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스타인 베블런 (문단 편집) == 여담 == 성격이 상당히 괴팍해서 밉보인 적이 많았고, 그 결과 대학을 세 번이나 옮겨다녀야 했다. 대학 측에서도 베블런의 강의 태도에 실망해 매년 강사계약을 갱신하는 방식으로 고용했을 정도. 그의 높은 명성에 걸맞는 계약은 아니었다. 강의 태도나 성격도 성격이지만, 사실 시카고와 스탠퍼드 대학에서 비난을 받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방탕한 자유연애 때문. 받은 러브레터들을 숨기지 않고 집에 들고가서 부인에게 들킨다거나, 내연녀와 함께 유럽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첫 부인과는 결국 [[이혼]]. [[학점]]은 랜덤으로 뿌렸다고 한다. 학생들의 지적 수준을 경멸했다는 듯. 그럼에도 몇몇 제자들을 남겼다. 처음 전공은 칸트철학이었다. 어쩌면 마르크스와 그의 본질적인 차이는 처음 시작이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과 [[임마누엘 칸트|칸트]]였던 데서 발생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전공을 갈아탄 후에도 프래그머티즘을 위시한 철학, 사회심리학이나 인류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케인스]]의 초기 논문들도 숙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재혼한 부인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는데, 둘 다 성격이 대국적이었는지 상당히 대충 살았다. 설거지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불도 잘 개지 않았다고. ~~그냥 평범한 자취생이네~~ 옷을 빠는 게 귀찮았는지 버려진 종이로 옷을 만들자는 주장도 했다. '''"좋은 연구는 하나의 질문을 두 개로 만든다"'''는 말을 남겼다. 연구자들이라면 다들 십분 공감할 만한 명언. 선두주자의 벌금이나 훈련된 무능력 등의 개념어만 봐도 알 수 있듯 언어의 마술사였다. 그는 모든 사회현상에는 그 이면이 있다고 여겼고 이에 따라 그의 글에는 그의 가치판단이 단어들마다 섬세하게 숨겨져있는데, 그래서 현대의 베블런 독자, 특히 비영어권 독자들은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수많은 난관에 마주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